곡식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문화권의 여러 나라 가운데 우리나라는 특히 곡물의 활용이 다채롭다. 이는 ‘백곡’이라 할 만큼 우리 땅에서는 수십 가지 곡물이 생산되고, 이에 따라 갖가지 곡물들에 대한 먹을거리로서의 다양한 활용이 있을 수밖에 없는 데서 온 결과다. 예를 들면 쌀은 우리 식생활의 기본인 밥으로 조리되면서도 그 활용이 확장돼 죽·떡·술·엿·지짐·과자·식혜·튀밥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된다.
곡물로 만든 음식 중에 특이한 것으로는 묵이 있다. 묵은 같은 농경문화권인 중국·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음식이다. 일본에 팥앙금을 굳혀 만든 ‘요깡’이라는 것이 있지만 음식이라기보다는 과자류에 가깝고, 또 ‘가마보고’라고 하여 우리말로 어묵이라 부르는 것이 있지만 생선의 살을 으깨어 뭉쳐 쪄낸 것이므로 우리의 묵과는 전혀 다르다.
묵은 메밀·녹두·도토리 등을 물에 불려 매에 갈거나 말려 가루를 내어, 그 앙금을 풀 쑤듯 쑤어 굳힌 음식이다. 대개 원료의 이름을 붙여 메밀묵, 녹두묵, 도토리묵, 녹말묵, 제물묵이라고 부른다. 녹말묵은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서 가라앉힌 앙금을 말린 가루인 녹말로 쑨 묵으로 약간 푸른색을 띠어 청포묵이라 하고, 제물묵은 물에 불린 녹두를 갈아 전대에 담아 짜서 나온 물로 쑤어 굳힌 묵을 말하는데, 청포묵(녹말묵)·제물묵을 합쳐 녹두묵이라 총칭한다.
도토리는 흉년의 구황식물로 중요하였다. 흉년이 들면 도토리 가루를 내어 떡이나 밥에 섞어 먹기도 했으나 ‘개밥에 도토리’라는 말처럼 곡식과 섞어 조리할 때 그리 어울리지 못하여 대개는 묵을 만들어 주식 대용으로 하였다. 도토리묵을 만들려면 도토리를 까서 말린 다음 절구에 빻아 물을 붓고 4~5일 동안 떫은 맛이 어느 정도 빠질 때까지 놓아둔다. 그런 다음 윗물을 따라내고 가라앉은 앙금을 걷어내서 끓이면 엉기게 되는데, 이를 식히면 도토리묵이 완성된다.
1855년, 조선시대 한방의 처방을 집대성하여 <방약합편>을 썼던 황필수는 1870년 우리나라의 음식명, 요리명을 방물학적으로 고증한 <명물기략>을 펴냈다. 이 책에서 황필수는 “녹두가루를 쑤어서 얻은 것을 삭(索: 얽힐 삭, 새끼 삭)이라 하는데, 항간에서는 삭을 가리켜 묵(社에서 士자 뺀 실사 변+墨: 두겹노 묵, 말고삐 묵)이라고도 한다. 곧 묵이란 억지로 뜻을 붙인 것이다”라고 했다. 또 1855년 김병규의 필사본으로 남아 있는, 만물의 명칭을 한자로 쓰고 이에 대해 한자 또는 한글로 풀이한 어휘집 <사류박해>에는 묵을 두부의 일종으로 보아 ‘녹두부’(綠豆腐)라 하였다. 이로써 보면 민간에서 ‘묵’이라고 불리던 음식명을 한자 이름으로 적으려다 보니 묵(위의 한자 복사)이 된 것 같다.
대전 유성구 구즉동에는 묵마을이 있다. 20여년 전 ‘할머니묵집’이 처음 문을 연 뒤 잇따라 한두 집 생기다 보니 이제는 마을 30여호가 모두 묵집인 묵마을이 되었다 한다.
[펌 : 한겨레21]